Replying to Avatar Jackie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갑자기 구남친이 좋아하던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판타지 소설이 생각난다. 거기에 자유와 복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냥 궤변 같기도 하고 딱히 어떤 철학이나 심리학적 개념과 연결되는거 같지도 않아서 그 희한한 썰을 열심히 풀어대는 구남친이 내심 한심했다 (그래도 워낙 좋아한다길래 나도 한번 읽어보겠다고 빌려달라고 했는데, 실수로 책 표지가 훼손되어서 사과를 했더니 “어차피 망가질거 생각하고 있었어“라는 대답을 듣고 황당했던 기억이... 말을 저렇게 정떨어지게 하는 것도 참 재주라면 재주임).

어쨌거나 판타지 소설이라는게 원래 좀 그런 건지 뭔가 좀 납득하기 힘든 자기들만의 세계관에 이것저것 갖다붙여서 썰풀기 좋아하는 오타쿠들의 세계? 그런 느낌이 좀 있음... 근데 이게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완전한 자유”가 좋은게 아니라고 말하는 이 세계관에 살짝 동의가 되기도 해서인데 (그러나 사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걸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고 하지 않나.. 난 여기서부터 이해를 포기했다)

아무튼 요는 자유를 무한정 얻는다고 해서 그게 항상 긍정적인 건 아니라는 거야. 여기에 대한 심리적인 설명도 덧붙이려면 덧붙일 수는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이 소설을 치장해주고 싶지는 않음

https://britg.kr/review-single/

판타지 소설도 걸작이 많은 세계이지만 서브컬쳐라는 것들이 기본적으로는 주류 문화의 하위갈래이기 때문에 주류 문화가 이야기하는 어떤 큰 사상이나 철학의 작은 갈래에서 변죽만 울리는 것들이 참 많고 유독 이 “변죽”스러운 것들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은근 많다. 청개구리 심보 같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구남친은 트랜스젠더는 아니고 명문대 나와서 괜찮은 회사 다니는 시스젠더 헤남이었지만 그에게도 그런 심리적 특성이 있었음. 그냥 묘하게 주류적인거 항상 싫어하고 비주류를 사랑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주류에 반하는 것이라면 뭐든 주워먹을 준비가 된.

비주류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힙스터가 되는건 아니고 그냥 세상에는 하버드가 싫어서 하버드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과 다 친구가 되다 보니 테러리스트와도 절친이 될 수 있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 항상 있어. 모두가 그런 극단주의자가 되는건 아니지만 일단 그쪽 계열 감성에 물든 사람은 어떤 좋은 터닝포인트를 만나지 못 하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 극단주의자의 심리적 영토에 속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더라.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한테 편한 것들만 계속 섭취하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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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ussion

적다 보니 구남친에게 좀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그는 아주 전형적인 한국인이라서 그의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의 대인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오는 사회적 압력 덕분에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하며 사는 사람 같았다. 그런 게 없었다면 머리만 좋은 외골수가 되어 평생 이상하게 살았을 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어렸을 때는 사람이 머리만 좋고 심성만 순하면 다른영역도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구남친을 만나면서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웠고, 머릿속에 지식이 많고 그걸 처리하는 능력이 좋은데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감각이 결여되었거나 그 감각이 거의 발달되지 못 한 구닥다리 컴퓨터 같은 사람들이 어떤 정치 사상 같은 것에 잘못 경도되면 얼마나 이상해질 수 있는지 실시간으로 많이 관찰했음... 어쩌면 그는 나를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나는 페미니즘 때문에 엄청 흥분한 상태였으므로. 하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인적 네트워크의 확장을 통해 나의 사회적 감각을 많이 업데이트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우물 안에 앉아서 정치 팟캐스트만 열심히 듣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감각을 업데이트할 수 없지.

그와 헤어지고 나서 소위 말하는 “스펙 좋은” 남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지. 구체적인 스펙이 중요한게 아니고 그냥 나는 사회성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 같아. 그걸 증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지표가 “스펙”이었을 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균형잡혀 있고, 뒤틀린 욕망이 없고, 건강한 사고 습관이 있고, 건강한 운동 습관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나 스스로도 계속 업데이트를 시도하다 보니 결국은 내가 그런 사람에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이게 뭐지 큰바위얼굴인가... https://christianlife.nz/archives/15136/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