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도 걸작이 많은 세계이지만 서브컬쳐라는 것들이 기본적으로는 주류 문화의 하위갈래이기 때문에 주류 문화가 이야기하는 어떤 큰 사상이나 철학의 작은 갈래에서 변죽만 울리는 것들이 참 많고 유독 이 “변죽”스러운 것들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은근 많다. 청개구리 심보 같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구남친은 트랜스젠더는 아니고 명문대 나와서 괜찮은 회사 다니는 시스젠더 헤남이었지만 그에게도 그런 심리적 특성이 있었음. 그냥 묘하게 주류적인거 항상 싫어하고 비주류를 사랑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주류에 반하는 것이라면 뭐든 주워먹을 준비가 된.
비주류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힙스터가 되는건 아니고 그냥 세상에는 하버드가 싫어서 하버드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과 다 친구가 되다 보니 테러리스트와도 절친이 될 수 있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 항상 있어. 모두가 그런 극단주의자가 되는건 아니지만 일단 그쪽 계열 감성에 물든 사람은 어떤 좋은 터닝포인트를 만나지 못 하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 극단주의자의 심리적 영토에 속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더라.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한테 편한 것들만 계속 섭취하려고 하니까.
적다 보니 구남친에게 좀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그는 아주 전형적인 한국인이라서 그의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의 대인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오는 사회적 압력 덕분에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하며 사는 사람 같았다. 그런 게 없었다면 머리만 좋은 외골수가 되어 평생 이상하게 살았을 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어렸을 때는 사람이 머리만 좋고 심성만 순하면 다른영역도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구남친을 만나면서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웠고, 머릿속에 지식이 많고 그걸 처리하는 능력이 좋은데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감각이 결여되었거나 그 감각이 거의 발달되지 못 한 구닥다리 컴퓨터 같은 사람들이 어떤 정치 사상 같은 것에 잘못 경도되면 얼마나 이상해질 수 있는지 실시간으로 많이 관찰했음... 어쩌면 그는 나를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나는 페미니즘 때문에 엄청 흥분한 상태였으므로. 하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인적 네트워크의 확장을 통해 나의 사회적 감각을 많이 업데이트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우물 안에 앉아서 정치 팟캐스트만 열심히 듣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감각을 업데이트할 수 없지.
그와 헤어지고 나서 소위 말하는 “스펙 좋은” 남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지. 구체적인 스펙이 중요한게 아니고 그냥 나는 사회성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 같아. 그걸 증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지표가 “스펙”이었을 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균형잡혀 있고, 뒤틀린 욕망이 없고, 건강한 사고 습관이 있고, 건강한 운동 습관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나 스스로도 계속 업데이트를 시도하다 보니 결국은 내가 그런 사람에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이게 뭐지 큰바위얼굴인가... https://christianlife.nz/archives/15136/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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